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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움'을 고민하지 않는 학생들
    기사 모음 2015. 12. 21. 12:48

    강추위에 귀가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 편의점에 들어가 핫바를 데워 먹던 중 옆에 있던 여고생들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A : "아, 제발 아무 과든 상관없으니까 OO대학교만 붙었으면 좋겠다!"
    B : "나도! 솔직히 과는 아무 거나 배워도 상관 없을 거 같은데!"

    순간 "작전으로 승부하라!"고 외치는 모바일 게임 광고가 생각났습니다. 요즘 이 표현을 가장 실감하는 이들이 있다면 올 해 수능을 치룬 수험생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치열한 정보싸움, 치밀한 눈치싸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접전의 시기. '대학 원서접수 시즌'이 곧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모든 학생들이 원하던 학교의 원하던 학과를 갈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실제로 많은 학생들은 본인 성적에 맞는 타협점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대하던 수능 성적에 못 미치는 학생일수록 이 고민은 커집니다. 그런데 이 고민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국숭세단? 건동홍숙?

    언론에서도 여러 번 다뤘었기에 이제는 많은 분들이 위 문장의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국숭세단은 '국민대, 숭실대, 세종대, 단국대학교'를 의미합니다. 건동홍숙은 '건국대, 동국대, 홍익대, 숙명여대'를 의미하고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하나로 묶어 SKY라 지칭하는 것처럼 비슷한 수준(?)의 학교들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요즘이 아~주 제철입니다. 원서접수 시즌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스카이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국숭세단광명상가…' 마치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단어들을 쏟아내며 어느 곳이 더 좋은 곳인지를 묻고, 따져가며 전략을 세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학생들이 서로 고민과 조언을 나누는 훈훈한 광경 속에서 한 가지 씁쓸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도무지 해결이 안 되는 문제. 바로 '학벌'에 대한 지나친 애착(?)입니다.

    위 사진은 수능생들이 가장 많이 가입돼있는 네이버 카페 <수만휘> 게시판의 모습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많은 학생들이 어느 곳이 더 나을지를 두고 각자의 고민과 조언들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전혀 안 어울려 보이는 학과를 두고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회계세무와 어문계열, 방사선과 식품공학도 보이고 심지어는 문과와 이과를 두고 고민하는 학생도 보이는군요.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전혀 다른 학과를 두고 결정을 못내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문제는 학생들에게 그다지 큰 고민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진 속 학생들이 던지는 질문들의 요지는 'A대학 OO학과 vs. B대학 XX학과 중에 어느 곳이 사회에서 더 알아주고 인정받는 곳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즉 네임밸류(사회적 평판, 인지도 등)가 문제인 것이지요.

    '국숭세단광명상가' 같은 마법의 주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꼭 명문대가 아니더라도 미묘한 차이의 레벨(?)마저 꼼꼼히 짚고 넘어 가겠다는 학생들의 의지가 느껴지시나요?

    "'어느 학교 쓸거니?'는 물어도 '뭐 전공할 거니?'는 별로 안 궁금해 하던데요"

    경기도 화성시 A고등학교에 다니는 이가영(가명)씨는 이제 예비 고3이 됐습니다. 가영씨는 신문에서 일부 대기업들이 탈스펙을 공언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영양은 학과보다는 학벌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학벌이 더 중요할 거 같아요. 지난 명절 때 친척 댁에 갔었는데 주로 어느 학교에 가고 싶은지를 묻지, 어느 학과를 가고 싶냐고 묻는 어른들은 많지 않았어요. 학벌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인가경에서 한서삼은 옆그레이드인가요?'

    위 질문은 주로 대학편입을 준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쓰입니다. 질문의 의미는 '인천대, 가천대, 경기대'에서 '한성대, 서경대, 삼육대'로 편입하면 네임밸류 혜택(?)이 없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대학 편입은 2012년도에 지방대를 살린다는 취지로 교육기술부가 모집인원을 대폭 축소하면서 경쟁이 더 치열해졌습니다. 경쟁률이 100대 1을 넘는 경우가 매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학생들이 여전히 휴학까지 불사하며 이 경쟁에 뛰어 듭니다.

    수능을 치룬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편입을 준비하는 학생들 역시 최근의 '탈스펙 바람'에 개의치 않고 '학벌 업그레이드'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대학편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 '독편사'에 올라온 글입니다. 편입에 도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80%(52명)의 학생들이 '학벌'을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배우고 싶은 전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응답자 1/4에 해당하는 20%(13명)에 불과했습니다.

    가톨릭대학교 편입 경쟁률이 학과별로 유독 고른 이유는?

    "더 나은 학벌을 위해서라면… 미적분 같은 거 몰라도 상관없다. 일단 붙고 보자!"

    대개의 경우 대학 편입모집 경쟁률은 인문계열이 자연계열에 비해 눈에 띄게 높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처럼 상대적으로 취업에 취약한 문과생들이 '학벌'에 대한 집착(?)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 표는 2015학년도 가톨릭대학교 편입 경쟁률입니다. 그런데 가톨릭대는 앞서 언급한 것과 달리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의 경쟁률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가톨릭대만이 유일하게 계열 제한 없이 똑같은 시험을 치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대학은 인문·자연계열이 서로 다른 시험을 치르지만, 가톨릭대는 인문·자연계열 구분없이 영어시험만으로 합격자를 선발하기 때문입니다.

    수학시험 없이 영어로만 뽑는 전형에선 문과생들이 이과생들에 비해 유리하기 때문에 문과생들이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자연계에 지원하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다소 무리하는 것처럼 비치지만 편입생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합니다.

    "학벌에만 집착했다간 후회할 수도..."

    수도권 A대학을 졸업한 26세 이재호(가명)씨는 지난 날 학벌에만 집착했던 본인의 모습을 후회한다고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교직에 서는 게 꿈이었던 이씨는 고교시절부터 사범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실제로는 사범대를 합격하고도 일반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사범대가 지방소재 대학이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사범대라고 해도 지방대에 가기보단 A대학에 가서 교직이수를 해 볼 계획이었죠. 근데 막상 가보니까 저랑 똑같은 생각으로 온 동기들이 꽤 많은 거예요. 그렇다 보니 경쟁이 너무 치열해져서 잘 안 됐어요. 자주 후회해요. 그냥 지방이라도 사범대 갈 걸… 하고요."

    B대학에 다니는 26세 정강호(가명)씨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경찰행정학과에 가서 일찍이 경찰 공무원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다소 생뚱맞은(?) 국문과에 진학했습니다.

    "경찰행정 합격하고도 본의 아니게 국문과를 갔죠. 갔더니 한문이랑 현대시, 고전수필 이런 걸 가르치더라고요. 저랑 완전히 안 맞는 스타일인데… 짜증났죠. 그것 때문에 학교 다니기 싫어서 결석하고 휴학하고 뭐 별짓 다했다가 지금은 후회 중이죠 뭐.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깝잖아요."

    "'명확한' 꿈이 중요한데..."

    화성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3년째 고3 담임을 맡고 있는 박선영(가명)씨는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꿈이라고 생각한다"라면서도 몇 가지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예전에야 서울대를 몇 명 보냈느니 하면서 현수막도 걸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꿈이 명확한 애들은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장려는 합니다. 그런데 애들 중에 분명한 꿈을 가진 애들이 많지가 않다는 걸 느꼈어요. 그러면 별 수 없이 조금이라도 높은 등급의 학교를 보내려고 또 노력을 해야죠.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학교랑 학원만 왔다 갔다하는 애들이 무슨 계기가 있어서 꿈을 찾겠어요. 커서 교사를 하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꽤 많은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학교 선생님을 제일 많이 보니까 그런 생각을 갖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래요. 애들은 갈수록 똑똑해지는데 안타깝죠. "

    곧 있으면 본격적인 대학교 정시모집 원서접수가 시작됩니다. 편입학의 경우 상당수의 학교가 벌써 원서접수에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던 전공분야를 잘 배우고 익혀 훌륭한 인재가 되면 참 좋겠지요. 그러나 학벌사회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외면하기도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수험생들에게 과연 뭐라고 조언을 해줘야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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