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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주에 생긴 '마법의 냉장고' "죽으라던 삶에 손 내밀어"
    우리 이야기 2017. 7. 20. 00:36

    전북 완주군 이서면에 설치된 '나눔냉장고', 이웃에게 음식 나누자 '감동 편지' 줄이어

    여기 냉장고가 하나 있다. 한 줄의 김밥, 두유와 시리얼, 양념장, 식용유, 고추장, 감자... 각종 먹거리가 한가득 들어있다. 심지어 쌀까지 있다. 그런데 전부 공짜다.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냥 가져가면 된다. 그런데도 좀처럼 냉장고가 비는 일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다양한 음식들이 채워진다. 

    물론 굳이 대가를 내겠다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돈으로는 안 된다. '감사하다'는 따뜻한 인사말에 가치를 더 높게 쳐준다. 냉장고 옆엔 메모지가 있다. 그보다 더 큰 대가를 지불하는 방법도 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져간 만큼 혹은 그보다 풍부한 먹거리를 냉장고 안에 넣어두는 것이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에 설치된 '행복채움 나눔냉장고' 이야기다. 시민들의 먹거리를 소외계층과 나누기 위해, 이서면 맞춤형복지팀이 지난 2월 독일의 먹거리 나눔 운동인 '푸드 셰어링'에 착안해 만들었다. 시민들이 후원한 각종 먹거리가 이 냉장고에 들어오고, 필요한 사람은 알아서 음식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운용한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만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냉장고는 시민 모두의 것으로 활용되고 있다. 덕분에 음식이 나날이 풍성해져 간다. 또 소외계층은 자신의 가난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지금은 완주를 넘어 전주·광주 등 타 지역에서까지 후원문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듣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이 냉장고, 어떤 모습일까. 18일, 나눔냉장고가 설치된 전북 완주군 이서면 한국전기안전공사 맞은 편을 찾았다. 

    "죽으라던 세상, 냉장고가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46분, 나눔냉장고 앞 벤치. 할머니 일곱 분이 쪼르르 앉아서 담소를 나눴다. 젊은이들이 맛집을 주제로 수다 떨듯 할머니들은 나눔냉장고 안 음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감자, 간장, 상추 등... 주제는 다양했다. 보슬비가 내리거나 말거나, 주병남(85) 할머니는 "오늘은 시루떡이 없다"면서 아쉬워했다. 

    사실 없는 게 시루떡만은 아니었다. 냉장고는 거의 빈 상태. 이서면 관계자에게 "맛난 게 가득 들었다더니 왜 소문과 다른 거냐"고 따지려던(?) 찰나, 마침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냉장고를 가득 채울 음식이 담긴 트럭이었다. 이서면 관계자는 "시민들이 직접 냉장고에 넣는 것 외에 몇몇 단체가 후원한 음식들은 이 차에 실려 온다"고 설명했다.

    "평범한 소시민뿐만 아니라 완주지역자활센터 등 단체에서도 음식을 보내줘요. 요즘에는 전주나 광주에서도 후원하겠다는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세상에, 너무 기쁜 일이죠?"

    드디어 김밥과 시리얼, 그리고 다양한 채소와 조미료 등이 냉장고를 가득 메웠다. 할머니들은 "이제 왔네"하며 냉장고 앞으로 몰려갔다.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한 할아버지도 냉장고를 훑었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개의치 않고 어르신들은 신중히 저마다 필요한 것을 골랐다.

    다 골랐다고 냉큼 가져가기만 하면 너무 정 없지 않나. 어르신들은 이서면 관계자들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넸다. 김복순(84)할머니는 "삼각김밥을 2개나 가져가서 미안하다"더니 "대신 다음에 내가 더 많이 가져올게"라고 덧붙였다. 

    김 할머니처럼 직접 표현하지 않더라도, 음식을 나누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은 곳곳에서 느껴졌다. 냉장고 벽면에 붙어 있는 수많은 메모지가 이를 증명한다. 맞춤법이 틀린 것이나 비뚤비뚤한 글씨의 메모는 대개 어르신들이 쓴 것, 내용에 애교가 섞여 있다면 학생들이 쓴 것이라고 한다. 학원 다니느라 바쁜 학생들도 이 냉장고를 자주 이용한다고 이서면 관계자는 덧붙였다.   

    "맞있게 잘 먹었습니다" 
    "마시서요 감사해요" 
    "땡큐붸리머치~♥"
     

    일부 포스트잇에는 냉장고 이용자의 사연도 담겨있다. 긴 글로 깨알 같이 적은 메모도 많았는데, 대부분 잉크가 바래져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서면 관계자는 업무 중인 집배원이 허기를 달랜 후 남긴 글 등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냉장고를 통해 용기를 얻었다"고도 적어 놓았다.

    "제 형편과 가난을 드러내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 실은 겉보기만 멀쩡하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거든요. 살아오면서 제가 들은 메시지는 '죽어라'였는데, 이 냉장고는 저더러 '살아라'라고 말하네요. 저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곳에서 벌었으니 이곳에 베푸는 게 당연하죠"

    이날 냉장고를 이용한 이들은 이서면 관계자에게만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았다. 먹거리를 제공한 후원자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한 할머니는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고생도 많이 한다"면서 자신도 나눌 것이 있으면 꼭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이 지역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이정민(48)씨는 나눔냉장고 후원자다. 그는 "모두가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씨는 "나눔냉장고에 꾸준히 후원하는 것은 그러한 세상을 위한 작은 첫 걸음"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벌었으니 이곳에 베푸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기본적인 먹거리라도 모두 동등하게 누렸으면 좋겠다"고 덧붙인 이씨는 한사코 자신의 나눔이 별것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대개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잖아요. 나누기 보다는요. 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나눔냉장고에 후원하는 것은 별 거 아니지만 제가 이 지역사회에서나마 얻은 만큼 나누기 위함이에요. 작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이라도 모두가 동등하게 지내길 바랍니다."  

    이씨와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많은 시민들이 나서주는 덕분에 나눔냉장고는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사업을 구상할 당시만 해도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한다. 이문희 이서면 맞춤형복지팀장은 "(음식들이) 빠지기만 하고 안 쌓이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나눔냉장고가 처음 놓였을 때는 우려가 현실이 될 조짐도 보였다. 몇몇 시민이 너무 많은 음식을 챙겨가는 경우가 종종 생긴 것. 그렇지만 먹거리를 정말 필요로 하는 이들, 그리고 후원자들의 진심이 점차 알려지면서 '나눔'이 더 활발해졌다고.

    "이제 냉장고를 상징하는 표현은 '나눔'이 됐어요. 어르신들도 음식들을 챙기는 만큼 새로운 걸 다시 갖고 오세요. 어떤 학생은 '어머니가 아프셔서 2개를 챙기게 돼 죄송하다'면서 나중에 우유를 가지고 왔어요."   

    이서면은 앞으로도 계속 나눔냉장고를 운영할 계획이다. 이문희 팀장은 "더 많은 분들이 작게나마 나눔문화에 동참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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