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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 참사 그 시기, 저는 방패든 의경이었습니다"
    우리 이야기 2018. 5. 1. 11:15

    꿈에서도 다신 가고 싶지 않은 곳이 군대다. 무엇이든 세월의 흐름 따라 잊히게 마련인데 그때의 안 좋은 기억들은 그대로 남아서가 아닐까.

    의경 출신인 이은성(가명·27)씨도 복무 시절 특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고 한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은 철야근무를 마친 날이었다. 철야근무는 국회, 미국대사관 등 국가 주요시설을 밤새 경비하는 일이다.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일한다.

    이씨는 그날 오전 9시쯤 부대에 복귀했다. 날씨가 참 흐렸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더욱 피곤했다. 얼른 자고 싶었다. 샤워에 빨래까지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서니 오전 9시30분쯤 됐다.

    내무반 분위기가 이전과 달랐다. 지휘관과 부대원들이 TV 앞에 눈을 떼지 못하고 서있었다. 평소 장비 치우느라 정신없던 이경(이등병)들조차 무전기 등을 그대로 든 채 얼음처럼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와...어떻게 하냐. 저 배에 몇 명이 타고 있다고? 엄청 커 보이는데?”

    적막했다. 이따금씩 탄식이 흘러 나왔다. 화면을 보니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 한 척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는 이들은 사실 많지 않았다. 아니,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이구동성이 돼 말했다.

    “구조되겠지.”

    다 같이 잠에 들고 정오가 조금 안 돼서 일어났다. 점심을 먹기위해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세월호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이 났다. 누군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다 구조됐대요”라고 말하면서다.

    거짓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내무반에 가 TV를 켜보니 화면에서 배가 사라졌다. 뉴스 앵커는 “가라앉았다”고 설명했다. 그 후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렇다 할 만한 뉴스는 없었다. 수백 명의 승객들이 배 안에 갇혔고, 구조에 실패했고, 대통령은 안 보이고. 그게 전부였다.


    “뭐야? 정말 이대로 다 죽는 거야? 아니 저걸 구조해야지 왜 저래?”

    점심식사 후 내무반에서 이런 말들만 반복되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됐다. 그때에서야 화면 속에 대통령이 보였다. 그가 말했다.

    “다, 그런,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지금요?”

    지휘관과 부대원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아, 지금 뭐래는 거야? 얘들아 우린 X됐다.”


    “진실을 밝혀라!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라! 아이들을 살려내라!”

    예상대로였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규모 집회가 매일 같이 벌어졌다. 18대 대선 정국 때 입대한 이씨는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을 시작으로 각종 시민·노동단체 집회에 많이 동원됐다. 그런데 세월호 집회는 남달랐다고 말한다.

    “그때 진짜 다르다고 생각했던 대목이 집회 참가자들의 연령층이었어요. 우리 또래 대학생들이나, 그보다 어린 고등학생들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거든요. 늘 빨간 머리띠 두른 분들만 보다가 교복 입은 학생들, 우리 엄마아빠 같은 어른들이 보이니까 오히려 더 긴장되더라고요."

    부대 분위기도 이전 같지 않았다. 집회시위 현장에 출동할 때면 ‘교양’으로 불리는 지휘관들의 공지 전달이 있었는데, 기존에는 “몸조심하고 시위대 도발에 흥분하지 말라”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집회에 나갈 때는 이 교양이 여러 번 반복되고 내용도 길었다.

    “대원들, 잘 들어. 알겠지만 세월호 집회는 너희들이 이전까지 나갔던 상황과 차원이 달라. 사람들이 죽었어. 나라가 초상집이야. 괜한 오해 살 수 있으니까 절대 시민들과 눈 마주치지 마. 화장실 가거나 흡연할 때도 웃지 말고 떠들지도 마.”


    안 그래도 웃고 떠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의경들도 다 알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어떤 사건인지를. 의경들 내부에서도 세월호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이씨의 다른 부대 동기는 “팽목항에 다녀왔다”며 “유가족들이 우는 음성이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 같았다”고 전했다.


    하루, 한 주, 한 달이 지날수록 이씨와 그의 지휘관 및 부대원들의 고통이 더해져 갔다. 세월호 집회에 출동하는 경찰쪽 대응이 변해가면서다. 참사 직후만 하더라도 기동복(진압복) 대신 근무복(일반 제복), 기동화 대신 근무화를 착용했다. 방패 소지와 구령 넣기도 금지됐었다.

    어느 날 “부대, 방패 들고 하차”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왔다. 지휘관과 부대원들이 웅성거렸다. 이씨는 당시 지휘관이 한숨을 내쉬며 “이러면 더 큰일 날 텐데 조심하라”고 말했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지휘관 예언했던 것 같아요. 나날이 상황이 격해졌잖아요. 집회 현장 곳곳에서 시민과 경찰 간 충돌이 발생하고 연행도 이뤄졌어요. 부대 분위기도 살벌해졌고요. 출동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못자다보니 예민해지기 일쑤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이씨 부대의 한 후임대원이 고참에게 크게 혼나 눈물을 훔쳤다. 그 후임은 세월호 참사 당일 뉴스를 보며 가장 분노했던 부대원 중 한 명이었다. 고향이 참사 발생지인 진도와 가깝다. 그런 그가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과 크게 다퉜다고 한다. 후임의 변은 이랬다.

    “우리도 힘든데 시민들은 저희더러 ‘너희 같은 것들도 인간이냐’고....”

    정부가 잘못한 대가를 왜 우리가 지고 있는 걸까. 이씨의 당시 생각이다. 그는 “정부는 마치 프로게이머 같았고, 우리는 그의 마우스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유닛들 같았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진실’을 갈망했다. 의경들이 타는 기동버스 안에도 TV가 있다. 이씨 부대도 가끔 쉴 때면 버스 안에서 뉴스를 봤다. “세월호 진실규명이 힘들 듯하다”는 식의 TV 스피커 소리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라”는 바깥 시민들의 절규가 동시에 들렸다.

    커튼을 아주 살짝 치고 바깥을 바라보면 눈물짓는, 분노하는, 허망한 표정으로 행진하는 시민들이 보였다. 이씨와 부대원들은 늘 말했다. 진실이 하루 빨리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이 상황이 빨리 마무리돼야 한다고. 방패를 든 의경들도 시민들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씨와 그의 부대원들은 모두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전역했다. 다사다난했던 복무 시절.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한 순간이 있을까.

    “저희 부대를 포함한 수많은 부대가 뒤섞여서 유가족 분들의 길을 가로막았던 적이 있어요. 죄송합니다. 진심입니다. 인파가 워낙 몰려있다 보니 실은 유가족 분들인 줄도 몰랐어요. 그래서 더 죄송해요.”

    2018년 4월 둘째 주말.

    이날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진행된다. 이씨도 그곳으로 간다.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이씨는 한 마디 덧붙였다. 

    “세월호 집회 당시에 시민들과 다툰 일도 분명 있었어요. 그렇지만 ‘의경들이 무슨 죄냐’며 되레 저희를 위로해 주신 분들도 많았거든요. 이제라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진심으로 고마웠다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또 4.16 세월호 참사,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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