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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전환점마다 있었던 '영원한 2인자' JP
    기사 모음 2018. 9. 8. 12:17

    김대중(DJ)·김영삼(YS)과 한국 현대정치사의 굵직한 궤를 같이 한 김종필(JP).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한국 현대사가 전환을 맞이할 때마다 그는 그곳에 있었다.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도와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며 군사정권의 2인자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는 한편 한국의 민주주의 씨를 내린 문민정부·국민의정부 출범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대권과 인연이 없었다. 그가 ‘영원한 2인자’로 불린 이유다.

    그럼에도 김 전 총리는 한국 현대정치의 ‘거목’으로 불린다.

    군에서 주로 정보 업무를 담당했던 김 전 총리는 4·19 직후인 1960년 5월 육사 8기 동기들과 함께 자진 예편했다.

    그러다가 1962년 5월 16일 자신의 처삼촌으로서 꾸준히 교류를 이어온 박 전 대통령과 군사 쿠데타에 나섰다.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면서 현역으로 복귀, 국가재건최고위원을 겸임하면서 한국 현대사에 전면 등장했다.

    현 국가정보원의 원조 격인 중앙정보부를 그가 창설했다. 그는 초대 부장을 역임하며 박정희 군사정권의 2인자로 등극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여섯.

    그럼에도 부침은 있었다. 모든 권력을 군인들이 쥐었던 그 시기, 김 전 총리도 육사 5·6기 생들과 갈등을 겪었다.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다. 이때 김 전 총리는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외유를 떠났다.

    그러나 그 해 10월 박 전 대통령이 제 5대 대통령에 오르자 귀국, 바로 다음 달 치러진 총선에서 충남 부여에서 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충남 부여는 그의 고향이다.

    가장 큰 위기를 겪은 때는 1965년이었다. 한일협정의 근간이 됐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공개되면서다. 이 메모 안에는 우리 정부가 일본에 ‘무상제공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을 요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당시 국내 여론은 일본에 대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재일동포 지위 보장 등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김-오히라 메모에는 이러한 내용은 빠져 있었다.

    결국 김 전 총리는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한일협정 반대운동(6·3 운동)이 커지면서 1964년 6월 2차 외유를 떠났다.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당선됐다가 이듬해 부정·타락 선거 논란에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3선 개헌을 추진하는 박 전 대통령 뜻에 반대하면서 집중 견제를 받기도 했다. 1968년 ‘국민복지회 사건’은 그에게 결정적 위기였다. 공화당 내 일부 인사들이 1971년 대선에서 김 전 총리를 후계자로 추대하기 위해 사조직을 만들었다는 의혹을 낳은 사건이었다.

    김 전 총리는 특유의 처세술을 내세워 위기를 돌파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 회동을 갖고는 돌연 입장을 바꿔 3선 개헌 홍보에 앞장섰다. 그 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박 전 대통령의 곁을 지켰다.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26 이후 그의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대권의 운은 그를 빗겨갔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퇴출됐다. 그해 5월 18일 새벽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유신시대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강제 은퇴 당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조용히 숨어 지내던 그가 다시 기지개를 켠 건 시민 주도의 민주화가 도래한 1987년. 우여곡절 끝에 직선제로 치러진 당시 대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8.1% 득표율로 4위를 차지하는데 그쳤지만 이는 그의 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1988년 치러진 제 13대 총선 때 그는 ‘충청의 맹주’로 우뚝 섰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대전과 충남을 중심으로 35석을 획득해 바람 일으켰다. 여소야대 4당 체제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며 정치적 위상을 공고히 했다.

    1990년 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추진한 3당 합당에 함께 했다. 이로써 그는 거대 집권여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다시 거듭났다. 물론 1인자 등극에는 실패했지만, 그 시기 김 전 총리가 추진했던 내각제 개헌 등은 여전히 미완의 정치적 실험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비(非)군인 출신 대통령을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에 이후 대선 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DJ)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이른바 ‘DJP 연합’을 깜짝 발표했다. 국민의정부 출범 후 한동안 실세 총리로서 2인자 역할을 맡았지만, 내각제 개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울러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대북정책을 두고도 김 전 대통령과 갈등을 겪었다. 그렇게 2001년 9월 DJP연합은 붕괴됐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면서 위기를 기회로 살려냈던 역량이 발휘되지 못했다. 김 전 총리가 이끈 자민련도 한나라당과 함께 노 전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탄핵 직후 제17대 총선에서 지역구 4석을 얻는 데 그쳤다. JP는 헌정사상 최초의 10선 의원을 노리며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섰지만 정당 득표율이 2.9%에 그쳐 낙선하고 말았다. 이로써 김 전 총리는 정계를 은퇴하게 됐다.

    2018년 6월 23일. 김 전 국무총리는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 측에 따르면 김 전 총리는 병원 도착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김 전 총리는 노환으로 별세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총리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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