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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꺼질듯 버티는 불빛…"야학을 살려주세요"
    우리 이야기 2018. 9. 8. 12:52

    허도영(71)씨는 가난하게 자랐다. 어릴적 6.25전쟁을 거치면서 무엇이든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없다. 하지만 허씨에게도 꿈은 있었다. 13세 때부터 학교 대신 신문배달 등의 일로 바빴지만 늘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꿈을 위해 공부할 수 있기까지 70년 세월이 걸렸다. 그동안 트럭운전과 전파상, 경비원 등 안 해본 일이 없는 그였다. 그런 허씨가 시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한바탕 병치레를 겪으면서다. 새 삶을 꿈꾼 그는 일했던 경비실 대신 학교로 갔다. 야학이 그를 반갑게 맞아줬다.

    “병상에 누워 인생을 돌아봤어. 난 과연 어떻게 살아왔나. 어릴 적 잠깐 학교에 다녔을 때가 떠오르더군. 참 신기했지. 복도와 교실 청소를 하는데 그곳의 공기, 선생님의 표정, 모든 것이 생생했어. 나는 분명 시인을 꿈꿨어. 그래, 일어나서 해보자, 다짐이 들더라고.”

    칠순을 코앞에 두고 찾아간 곳은 전북 전주시의 샛별야학. 마침 교육비도 무료였다. 하지만 낡은 간판과 건물, 게다가 반지하. 심지어 아무리 청소해도 안 될 것만 같은 지저분한 계단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지만 그저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만으로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실제 계단을 내려가 보니 달랐다. 억지로 꾸며놓은 듯했지만 나름 화사했다. 교사들도 학생들도 그랬다. 특히 학생이라면서 본인과 비슷한 또래가 많았다. 전부 허씨와 사정이 비슷한 이들이었다. 가난 때문에 배움은 못 얻었지만, 꿈이 있는 나이 든 학생들이다.

    1년 동안 매일 같이 야학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국어, 한국사, 영어, 수학, 도덕, 사회, 과학을 배웠다. 간절함 때문인지 국어는 특히 잘했다. 100점도 맞아 봤다. 가끔 떠나는 수학여행과 소풍도 재밌었다. 정말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허씨는 지난해 대학에 입학했다.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7학번 허도영'. 그는 이제야 진정 꿈에 한발 다가선 기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야학 덕분이라고도 말했다. 허씨가 야학을 졸업하고도 그곳을 잊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허씨가 본 야학의 밝은 모습은 어쩌면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오늘날 대부분의 야학은 실제로 울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 때문에 잃어야만 했던 배움의 기회를 다시 제공해주는 곳이 야학이지만, 지금의 야학들은 가난과 열악한 환경에 허덕이며 간신히 버티고 있다.

    1980년대 전성기를 이뤘던 야학은 현재 그 숫자가 당시의 3분의1 수준으로 파악된다. 신군부가 집권했던 시기 야학은 민주화·노동운동의 거점이었던 만큼 서로 결집은 물론 존재마저 드러내는 게 어려웠다. 때문에 현황 파악이 이뤄지지 못했다.

    야학들의 조사는 2014년이 돼서야 진행됐다. 전국야학협회(전야협)가 교육부 등의 지원을 받아 전국 야학의 전수조사를 벌였다. 전야협은 야학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가 큼에도 관련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 또 마지못해 불을 끄는 곳이 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실태조사를 했다.

    조사결과 오늘날 야학(장애인 야학 제외)의 현실은 그야말로 암담했다. 당장 숫자부터 62곳에 불과했다. 1980년대에는 서울에만 약 300곳의 야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62곳의 야학 중 37곳(59.7%)은 비영리단체로, 15곳(24.2%)은 학력미인정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83.9% 이상의 야학이 교육 소외계층에 대한 문해교육 등을 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야학 학생의 연령대는 50대 이상이 80.5%인 것으로 조사됐다. 놀라운 점은 여성 학생 비율이 전체 학생 중 94.2%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옛 남아선호사상의 영향으로 교육에서 배제된 여성들이 주로 야학을 찾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대부분의 야학이 열악한 재정, 교육환경에 처해있다는 점이다. 전야협이 각 야학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10곳 중 7곳이 ‘건물 노후화’ ‘예산 부족에 따른 운영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실제로 허씨가 다녔던 전주 샛별야학만 하더라도 최근 문을 닫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오랜 기간 무료로 공간을 내어줬던 새마을금고 금암지점이 내부 리모델링 등을 이유로 퇴거를 요청하면서다.

    다행히 샛별야학은 인근의 전라중학교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야학이 이처럼 누군가의 후원이 있어야만 존재 가능한 현실을 못 벗어난다면 위기는 만성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상당수가 사라지고 만 야학이라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이유가 그래서다. 62곳의 야학은 전국 8도 모든 곳에 존재하고, 여전히 야학을 찾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6.25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며 배움의 기회를 놓친 이 시대 부모들이 주변 곳곳에 존재한다.

    천성호 전야협 교육연구원장은 국가와 기업, 지자체와 시민사회 모두의 관심만이 꺼져가는 야학의 불을 다시 밝힐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교육부의 성인문해교육기관 지원사업에 따라 충분한 규모(49.5㎡)와 인원(30명)을 갖춘 야학은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실제 지원받는 곳은 전체 대비 약 20%에 불과하다”며 “지원 기준을 완화하는 것도 일종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기준이 완화돼도 지원받을 여력이 안 되는 야학도 많은 만큼 중요한 건 주변의 관심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적극 지원에 나서거나, 시민들 사이의 후원문화를 조성하는 게 대안이라는 것이다.

    천 원장은 “야학이 언제는 돈 많았던 적이 있었느냐”면서도 “야학이 자립 능력을 키우는 게 물론 중요하겠지만, 야학 자체가 법인이 되면 기업이 후원 시 연말에 정산받을 수도 있는 만큼 지역 기업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전했다.

    현재도 대부분의 야학은 생존을 바라며 사람들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야학 학생의 고등검정고시 합격자 비율은 45.1%다. 학생 대부분이 중장년층이란 점에 비춰보면 야학이 교육소외계층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천 원장은 “야학이 많이 줄긴 했어도 대도시와 중소도시 많은 곳에 포진해 있다”며 “폐교를 하더라도 야학이 더는 필요 없는 세상이 도래해 문 닫을 수 있도록 시민분들이 주변을 둘러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전국에는 장애인 야학도 27곳이 있다. 전체의 56.6%가 중학교 이하 학력인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검정고시와 인권교육이 이뤄지는 기관이다. 장애인 야학은 대체로 증가하는 추세인데, 성인장애인의 저학력 현상이 심각한 만큼 교사와 학생 수급 등 관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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