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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그저 '목숨' 안 걸고 이동하고픈 이들
    우리 이야기 2018. 9. 8. 13:04

    지난달 9일은 6·13 지방선거의 사전투표 둘째 날이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대체로 비슷한 때였다. 찍어야 할 용지가 최대 9장에 달하는 투표의 방법은 무엇인지, 투표율은 얼마나 나올지, 어느 당이 이길지, 누가 당선될지 등.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느 한 곳에서는 “우리도 투표 좀 하게 해달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미성년자도, 외국인도,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이도 아니었다. 어엿하고 건전한, 분명히 한 표의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유권자였다.

    다만 휠체어에 앉았다는 정도로 아주 조금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다름이 거대한 차별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이날 적잖은 이들이 알게 됐다. “우리도 투표 좀 하게 해달라”던 장애인들은 투표소를 빤히 앞에 두고도 들어갈 길이 없다고 호소했다.


    “그동안 나아진 게 없어요.”

    지난 3월 15일 서울 신길역에서 최용기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가 장애인들이 겪는 문제를 두고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는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언제까지 장애인이란 이유로 목숨을 걸어야 하느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조차 보장 못하는 우리 사회 현실에 그 역시 장애인으로서 일침을 가한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리는 계단 한 칸이 장애인들에겐 목숨을 걸게 만드는 절벽 같은데, 국내의 상당수 시설은 이 절벽 외 다른 이동 경로를 조성하지 않았다.

    지난 1월 우리 사회는 그래서 또 한 명의 사람이 소중한 목숨을 잃는 장면을 목격했다. 서울 신길역(5호선)에서 휠체어를 탄 한경덕(63)씨가 가파른 계단에 굴러 떨어져 결국 목숨을 잃었다. 리프트 호출 버튼을 누르기 위해 휠체어 방향을 틀던 중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모든 죽음이 그렇지만 그의 사망은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씨는 베트남전쟁에서 다친 상이군인이었다. 재활치료를 받으려 병원에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그가 리프트 버튼을 누르기 위해 방향을 틀었던 것 역시 전쟁 후유증 등의 이유로 왼손을 사용할 수 없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라를 위해 몸까지 바쳤지만, 나라는 그의 이동할 권리조차 보장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시면서 집안 전체가 난리가 났다. 온 가족이 병원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신길역 역무실에서 전화가 오더라. 휠체어가 부수어져 파편들이 널려 있으니까 와서 빨리 치우라고. 매형이랑 둘이 가서 치우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한씨의 아들 영수씨가 사고 직후 겪은 일이다. 화가 나서 서울교통공사에 거칠게 항의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계속되는 책임회피에 따른 분노와 좌절뿐이었다. 휠체어 파편을 치우며 흘린 눈물은 아버지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대하는 이 사회의 태도도 커다란 이유였다고 했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그는 시민단체와 함께 서울교통공사, 그리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결심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 등 장애인단체는 요즘 바쁘다. 신길역 사고를 계기로 장애인들의 미흡한 이동권 및 접근권 실태를 조사했고, 그 내용들을 세상에 알리려는데 문제를 제기해야 할 대상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자는 곳과 먹는 곳 전부 장애인 차별을 이유로 고발해야 했다. 우리나라 대표 숙박시설이라는 호텔신라에는 장애인 객실이 전체 객실 중 약 1%에 불과했다. 투썸플레이스, GS리테일 등 주요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단차 없는 출입구,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 등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업체들 입장에선 사실 운이 없어서 걸렸다는 말도 나온다. 이들은 실은 ‘본보기’일 뿐이라서다. 장추련 관계자는 “각 업계를 대표할만한 곳이 장애인 이동권 및 접근권 확보를 위해 선제적으로 나서는 게 변화의 첫걸음”이라며 이들에 소송을 건 이유를 설명했다. 

    결국 장애인 접근성이 확보되지 않은 시설을 일일이 고발하자면 끝이 없기에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는 뜻이다. 이 같은 현실에 대해 일부에서는 “어느 나라를 가도 다 똑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애인을 대변하는 이들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씁쓸하기만하다.

    장애인 단체와 함께 접근권 실태 조사에 나선 이태영(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외국기업인 스타벅스를 보고 사실은 조금 당황했다”고 고백했다. 생각보다 장애인의 접근성을 잘 갖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으레 잘 안 되어 있겠거니했는데 나름의 반전이 있었다고.

    그에 따르면 실제로 미국은 1992년 ‘미국 장애인법’을 발효, 신축·증축·개축되는 모든 건물에 대해 미국 장애인법의 접근성 기준을 준수하도록 했다. 스웨덴은 식당과 회사의 종업원이 단 1명에 불과해도 모든 장애인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건물이 설계, 디자인돼 있다. 


    물론 제도 개선만이 전부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도 수반돼야 한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 또한 동등한 공동체 일원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난달 14일 벌어진 장애인들의 ‘지하철 내렸다 타기’ 시위는 그러한 노력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웠다. 이날 장애인들은 신길역에서 지하철에 탑승한 후 시청역까지 내렸다 타기를 반복했다.

    장애인들의 시위에 불편을 토로하는 일부 시민들은 거친 말을 내뱉었다. 장애인들에게 “나가라”고 소리친 이도 있었다. 장애인들은 “지하철역 리프트 등 우리의 이동권에 대해 시청에서도 묵묵부답”이라며 “우리 때문에 불편하다고 신고해도 좋으니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일부 시민의 항의는 이어졌다. 

    당시 그 자리에 함께 한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시민들이 장애인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보지 않는 듯해 무척 슬펐다고 했다.

    김 사무국장은 “비장애인이 지하철 역사 내 시설을 이용하다 사망했다면 과연 그랬을까. 비장애인이었다면 공감도 더 받고, 적어도 항의까지 받는 일은 없었을 거다. 같은 시민으로, 같은 교통편을 이용해야 하는 사람들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했다. 그는 “같은 시위를 몇 차례 반복하며 우리의 메시지를 던지다 보니 차츰 시민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며 “서서히 ‘저들은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장애인이 목숨 안 걸고 이동하는 세상은 언제 올까. 이제 막 싸움은 시작됐다. 6일 신길역 사건에 대한 첫 재판이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장추련 등은 해당 사고가 지하철 역사 내 리프트의 잘못된 위치설계 때문이라며 서울교통공사에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 재판은 장애인들의 이동권과 관련한 올해 첫 재판이다. 각종 숙박시설과 유통매장에 대한 재판이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피고는 해당 업체들과 대한민국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안 지켜지고 있으니, 장애인들을 차별로부터 구제해 달라는 게 소송의 요지다. 

    가장 먼저 진행되는 손배소에 장애인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만약 이 소송에서 서울교통공사가 한씨 죽음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온다면, 다수가 이용하는 지하철역이 정작 장애인들의 이동할 권리는 보장하지 못하고 있음을 법원이 인정하는 셈이다.

    이 경우 앞으로 진행될 차별구제청구소송에도 영향을 줄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법원이 일관된 논리로 판단하리란 믿음도 있다. 이런 간절한 바람을 갖고 싸움을 시작한 장애인들은 목숨을 안 걸어도 이동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누군가에겐 생명을 건 재판이다. 장애인들을 대변하는 이 변호사는 이번 소송의 취지가 매우 간단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진정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차이가 차별을 낳지 않는 사회,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사회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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