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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 수성고 '악몽'…떠오르는 게 '폭력'뿐
    단상 2019. 8. 30. 09:41

    부제 : 선생님들을 떠올려 봄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꿈을 꿨다. ‘개꿈’이었겠지만 깬 뒤의 기분이 썩 더러웠다. 대개 길·흉몽 여부는 눈뜬 뒤 감정으로 가늠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꿈은 분명 길몽은 아닌 듯싶다.

    수원 수성고

    고딩 시절 기억은 내게 좀 특이하다. 제 아무리 힘든 시절이었다 한들 때가 지나면 ‘추억’이 되게 마련인데 고딩 때 기억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한 악몽처럼 느낀다. 그때가 어지간히 싫었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모교를 떠올리면 ‘폭력’이 8할이다. 교사들의 체벌과 가혹행위 등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됐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추억으론 포장을 못하겠다. 옛 시절은 다 그랬다는 따위의 말도 와닿지 않는다.

    수원 수성고등학교. 입학 시 전교생이 ‘서약서’를 쓰는 학교였다. 물론 학교 측 강제에 따른 거였다. 서약서엔 “학생에 대한 (학교의) 어떤 조치에도 순응할 것”이란 내용이 담겼다. 체벌을 달게 받겠다는 문서로서 일종의 ‘신체포기각서’라 불렸다. 

    서약서가 학생들을 그저 겁주려는 용도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숱한 체벌이 이뤄졌다. ‘사랑의 매’란 게 정말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를 넘어서는 폭력이 빈번했단 게 심각한 문제였다.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돌이켜 보니 선생의 '탈'을 쓴 악마가 여럿이었다. 

    수성고 매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어이가 없는 학교였다. 학부모들이 목공소에서 일정한 규격의 ‘몽둥이’를 제작해 학교에 전달하는 곳이었다. “애들 때려라”는 목적의 물건을 만들면서 참으로 고상한 의미까지 부여했더랬다. 자녀에 대한 교육 권한을 교사에 넘긴다나 뭐라나.

    뭐, 나름의 합리적인 측면도 있긴 했다. 체벌이 합법화된 때였던 탓에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 폭력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학생에 손찌검이나 발길질하는 교사들이 세상에 분명 있었다. 수성고 학부모들이 몽둥이를 제작, 교사에 전달하는 것은 “체벌 시 이 매만 사용하라”는 뜻도 있었다.

    당연히 수성고에서 그런 뜻은 지켜지지 않았다. “피닦아”라는 표현이 특정 졸업기수의 전설처럼, 심지어 무용담처럼 학생들 사이서 퍼졌던 학교였다. 한 교사가 학생을 손과 발로 두들겨 패고 나니 학생에 피가 났고, 교사는 “피닦아”라는 짧은 말을 남겼단 그런 얘기였다.

    사실 풍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때에도 교사에게 맞아 피 흘린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꽤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야자 시간에 백 모 교사는 “명찰을 비뚤게 달았다”며 우리 학급 학생을 그렇게 두들겼다. 앉아 있는 학생의 목을 걷어차기도, 주먹질까지…

    2006년 수원시민신문 기자가 촬영. 저작권 문제 시 삭제 예정. 

    군기가 바짝 든 학생들과 지내서인지 이곳 교사들은 대체로 타학교 교사보다 권위가 높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일부 교사들은 그 권위를 그릇된 방식으로 내비쳤다. 걸핏하면 튀어나오는 안하무인격 태도에 “저런 놈도 선생인가” 싶을 때가 사실 많았다.

    일례로, 어쩌다 한 번 야자 때 간식이 들어오곤 했는데 몇몇 교사들의 배달원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가관이었다. 중장년층의 배달원들에게 “어이~아저씨, 왜 이렇게 빨리 와서 냄새 풍겨요”했던 임 모 교사의 음성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여긴 악명 높은 수성고다"라는 과시 아닌 과시를 난데 없이 배달원에 내뱉는 듯했다.  

    물론 모든 교사들에 대한 얘긴 아니다. 사실 수성고 선생님들은 고생이 많았다. 학생들과 등하교를 함께 하다 보니 웬만한 대기업 직원들보다 더 힘들었을 게다. 오전 7시 등교에 오후 11시 하교였으니, 체력이며 스트레스며 보통이 아니었을 테다.

    체벌에 관대한 분위기를 악용해 제 멋대로 학생을 괴롭히고, 때린 교사들은 한 학년 당 2~3명 정도로 기억된다. 그들 외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는 만큼이나 제자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고 느꼈었다.

    다만 다수의 좋은 선생님이 계셨음에도, 그때가 악몽 같은 건 ‘최악’의 존재도 적지 않아서 같다. 이제는 변화한 수성고라지만 궁금하다. 후배들이 좋은 환경 속에서 꿈을 키워나가길, 선생님들 역시 늘 그렇듯 노력해 주시길.

    이 대목에서 세상 ‘선생님’들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세대 차이가 있긴 하나, 상당수가 경험한 학창시절이다. 이 시기가 누군가의 ‘추억’이 될지, ‘악몽’이 될지는 선생님들에게도 달렸음을 깨닫는다.

    나의 수성고에 대한 그것처럼 소수의 악마가 선한 다수의 역할을 뭉개고, 그 시절을 통째로 ‘망가진 기억’으로 남게 한단 사실을 악마들은 알까. 아, 또 생각난다. 자신이 성대 법대 출신의 입시 전문가임을 거듭 강조하고, 성적이 뒤쳐진 학생은 상종도 안 했던 권 모 교사.

    그들 악함의 사악한 정도는 생각보다 크다. 나는 앞서 거론한 백 모 교사, 임 모 교사, 권 모 교사로부터 심한 체벌을 당한 적 없다. 그럼에도 이들 교사와 함께 했기에 잠결에 꾼 학창시절 꿈이 악몽이 된 건 아닐까.

    부디 그들의 모습이 이젠 바뀌었으면 한다. 제도상의 이유로 예전처럼 학생들을 다루진 못하겠으나, 좀 건강한 정신 상태로 교단에 서있길 바란다. 지금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고 있을 학생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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